본문
|
공의 자는 사치(士致), 호는 서화(西華). 諡號는 효정(孝貞)이다. 청강공(諱 濟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副正子, 贈 左贊成 기준(耆俊)이고, 아버지는 현령 중기(重基)이고,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 典簿公 색(穡)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 진사시에 합격한 뒤, 1617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로 기용되었다. 이어서 저작을 거쳐 박사에 올랐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문장이 왕에게 인정되어 주서로 들어가 왕이 내리는 전교와 교유문을 거의 맡아서 지었다. 이어서 홍문관의 교리로 발탁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론에 반대하여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그 뒤 화의가 성립되자 부빈객(副賓客)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인질로 잡혀가는 길을 심양(瀋陽)까지 호종하여 고초를 함께 겪었다. 심양에서 돌아온 뒤에는 열 한가지 벼슬을 거쳐 大司憲을 지내고 吏曹判書와 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1647년 右議政에 오르고 이듬해 사신이 되어 청나라로 들어가던 도중 병을 얻어 평안도에서 별세하시었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 민심을 무마하고 세금을 격감하는 등 치적이 많았다.
공은 어려서 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기량이 넓어 많은 사람들이 대기(大器 )로 지목하였다. 6살 때 壬辰亂을 구하러 나온 중국 장수가 보고 기이하고 사랑스럽게 여겨 날마다 손을 잡고 함게 거닐며 말하기를 반듯히 크게 귀히 될 것이라 하였다
천계 계해년(1623)에 정자(正字)를 거쳐 박사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창졸간에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손에 활을 들고 몸을 낮추면서 나섰으니 대체로 사건의 성질에 따라서는 죽을 각오를 한 것인데, 밝을 녘에는 인조께서 반정한 것을 알고 즉시 어전에 나아가 임금께 뵈오니, 임금이 급히 공에게 명령하여 옥의 자물쇠를 부수고 갇힌 이들을 풀어 놓으라고 하였다. 그때에 서역(書役)할 것이 번거롭고 많았는데 공이 빠르고 속하기를 신처럼 처리하니 그때부터 王의 교론 기타 문서를 모조리 공에게 맡겼지만 얼마있지 않아서 몇 천장을 써내는데 한자도 틀리지 않았으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글씨[飛書]라는 별명을 붙였다.
벼슬자리에 앉아 일을 처리할 때에는 청렴하고 근신하는 것으로 제일 목표를 삼았다. 임금께서 지우함을 받아 긴요한 자리를 거치어 정승의 지위까지 올랐고, 전후 30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논밭이나 가택이나 노복들이 옛날보다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난리를 겪고 난 뒤에 집이 허물어진 것을 혹 다시 짓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이 말하기를
『난리 뒤끝이 아직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집지을 생각을 하겠느냐!』고 하였다.
공무가 끝나서 물러나오면 문을 닫아 걸고 삿자리에 기와로 구어 만든 베개을 베고 드러누워 있는 폼은 쓸쓸하기가 이를데없어,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손님이 찾아오면 술을 내어 서로 즐기며 밤이 되도록 담소하니, 보는 이들이 왕사(王謝)의 풍도가 있다고 하였다. 공이 젊었을 때에 꿈 가운데서 시를 한 수 지었는데 『늙으막에 장상(將相)을 사양하고 돌아가서 산수간에 누워 있으리라.』라는 것이었다. 정승이 되고서도 항상 물러나 쉴 뜻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대체로 공의 꿈속의 시는 반은 맞치지 아니못한 셈이었다.
정해년(1647년 12월 7일)에 특별히 우의정으로 발탁되었고, 무자년(1648)에 임금의 명을 받아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공이 이때에 이미 병이 깊었는데도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길에 올랐으나 병이 매우 심하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래어 태의(太醫)를 엄선하여 가서 병을 치료하여 구하라 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었다. 세상을 떠나는 자리에서 의주부의 관원에게 말하기를『임금의 명을 받고 떠났는데 이 일을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나의 한이로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부고를 받고 크게 슬퍼하였으며, 이어 말씀하시기를 아깝구나, 나의 훌륭한 보좌를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무자년(1648) 4월 16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57세였고, 양근(楊根)의 수남리(水南里, 현 양평군 서종면 수릉리에 장사지내니 이곳은 즉 공의 선영이다.
尤庵 송시열이 신도비문을 찬 하며 명(銘)을 엮으니 다음과 같다
전의(全義) 이씨들은 여초(麗初)부터 나타나서,
조선초의 효정공은 행의(行義)가 탁월하며,
청강공에 이르러서 명성이 크게 울리었고,
자손 또한 번창하여 순풍에 돛이러니,
현령공은 촉망에 비해 위계 낮아 아까웠네.
저승에서 자손 도와 다시 창성 하는 건가?
어릴적에 남과 달라 중국 장군 놀랐으며,
과거는 알성이요 뭇 닭 속에 학(鶴)이었네.
착한 임금 중흥 도와 현준(賢俊)들의 뜻을 이어,
여러 청현 거치면서 막힘없이 나아가서,
직위마다 충의 바쳐 나라 운을 이끌었네.
화한 얼굴 곧은 말씀 정의위해 쟁간(爭諫)하며,
해마다 지위 올라 재상까지 되시었네.
반대파도 당도 없고 외면한 일
누가 하나 임금님의 슬퍼했네.
성효로운 자손있어 공의 신도 밝히려네.
묘 앞에 행적 새겨 아름다움 영원하리.
내 지금 명 지으니 사모 더욱 끝이 없네.